연산군과 장녹수,, 관기에서 후궁까지 흥청망청
장녹수는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의 종으로 가노와 혼인하여 아늘까지 있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장한필로 양반의 핏줄 이었습니다.
그시기 조선시대에는 신분제도가 철저하였으며 부모중 한명이 천민이라면 그 자손 역시
천민이 되는 것이 당연했기에 장녹수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노비가 되었던 것이죠,
장한필이 문의 현령으로 있을때 관기와 관계하여 장녹수를 낳았고 장녹수는 어릴때부터
기적에 올라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관기라면 수령이나 벼슬아치들의 공식적인 성노리개였으며 장녹수의 입장에선
이런 운명을 거부할 수도 없었던 것이죠.
연산군이 장녹수를 처음 만난것은 1502년 제안대군의 저택이었는데 이때는 연산군이
매우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고 있을때 입니다.
그 당시의 장녹수의 나이는 서름 남짓이었고 아들까지 있었지만 그 외모를 보면 마치
16세 정도의 어린 처녀처럼 어려 보였고 목소리까지 아주 맑고 청하하였다지요,,
연산군은 장녹수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 버렸고, 그 즉시 궁궐로 데려와 종 4품 숙원에
봉하게 됩니다.
장녹수는 특유의 미모와 교태를 발휘하여 모성에 굶주린 연산군의 마음속 허전함을
채워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장녹수는 종 3품 숙용으로 품계가 상승하였으며 아들과 공노비로 있던 친언니
장복수 면천의 기쁨까지 맛보게 됩니다.
연산군은 단종 이후 처음으로 궁궐에서 태어난 원자로 학문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문학적
재능도 탁월했으며 효성도 매우 지극한 왕이었습니다.
즉위 초에는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심을 바로잡고 과거를 열어 인재를 등용하는등의
정치력 또한 상당히 뛰어난 왕이었습니다.
두 차례의 사화를 통해 절대 왕권을 확보한 연산군은 혁신적인 통치를 시도했는데
특히 유교의 복잡한 의례를 배격하고 실질적이고 간소하게 권장하였으며
이런 시도는 유학을 신봉하던 사대부들에게 국가 정체성을 파괴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반정의 분위기를 만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505년 정초 연산군을 폭군으로 규정하며 정변을 선동하는 종루벽서사건이 일어났으며
연산군은 유배보낸 사람들에 대한 감시를 더욱 철처히 하게 합니다.
하지만 연산군 12년인 1506년 자신에게 아부하던 사람들에 의해 반정이 있어나고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갔으며, 이때 장녹수는 참형을 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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