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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스피치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배경 및 활동 김구선생

by 서리니 2017.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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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배경 및 활동 김구선생



불과 100여년 전의 이야기, 우리가 잘 몰랐지만 반드시 알아야만 되는 역사!!

오늘은 그런 이야기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배경 ★


1991년 3월 1일 한반도 전체가 독립 만세의 함성으로 뒤덮였던 이날,,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을 온나라에 드러냈으며, 3.1운동의 물결은 이나라를 넘어 세계에 분포되어 있던 독립운동가들을 하나로 모으는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그리고 1919년 4월13일, 바로 이날 상해의 어느 프랑스 조계의 지역에서 3.1운동이 만든 토대 위에 한 나라의 임시정부가 탄생하게 됩니다. 같은해 9월에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떤 대한민국의 임시정부들은 상하이 지역을 중심으로 흡수, 통합되어 통합 임시정부로 발전하게 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김구선생



이 분들은 최초 3권 분립(입법, 사법, 행정)의 공화정을 세우면서 독립 자금을 위한 연통제(국내 비밀 행정 조직망)와 교통국(임시정부 통신 기관)을 국내에 설치하게 됩니다.

이때 김구선생은 초대 경무국장에 임명되어 일본의 첩자들을 색출하고 배신자들을 처단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게 되고,,

당연히 이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곱게 볼일 없는 일본은 국내의 연통제와 교통국을 파해쳐 2녀연 만에 파괴시키고 임시정부를 기다리고 있떤 것은 장미빛 미래가 아닌 길고 험난한 여정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독립자금이 너무나 부족한 상황에 임시정부를 위해 미국 동포들이 모금한 자금을 가져 오기로 했지만 1920년 12월 돈한푼 없이 상해에 도착하여 임시정부의 상황은 더욱 힘들어지게 됩니다.

또한 이승만이 위임통치 청원서를 미국의 윌슨 대통령에게 보낸 것에 대해 임시정부 대원들은 크게 분노하게 됩니다.

당시 즉시 독립을 원하는 대한민국이 또 한번 국제 연맹에 운명을 위탁한다면 지금과 별다를게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국제연맹 청원이 원인이 되어 임시정부는 또 한번 분란과 대립이 발생하고 결국 1923년 분열을 막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한 긴급회의가 열리게 됩니다.






@ 1923년의 국민대표회의


이 당시 신채호는 창조파의 대표로 이승만을 탄핵하고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다시 새롭게 출발하자는 주장을 했으며, 안창호는 개조파의 대표로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잇고 그 안에서 새로운 변화를 만들어 보자고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회의는 결렬 되었으며 많은 인사들이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이후 이승만을 탄핵되었으며, 구심력 없는 임시정부는 안된다며 끝까지 남아 임시정부를 수습한 것은 바로 김구선생이었던 것입니다.



이때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후 가장 어려웠던 시기 , 밥도 굶어가면서 요원들을 위해 김구선생의 어머님은 배추 껍데지를 줍기 위해 시장 쓰레기통을 뒤지기도 했었다 전해집니다.

이후 1931년 일본 관동군은 만주를 침공하고 만주국까지 세우면서 임시정부는 끝이 보이는듯 했지만 이때 두 청년은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데,,  



대한민국임시정부김구선생



@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 (1932년)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있었던 김구선생은 1931년 일제의 주요 요인 암살을 위해 만들어진 독립운동 조직 한인애국단을 창설합니다.

1932년 1월 당시 32살의 청년 이봉창 의사는 일본 왕이 탄 마차에 수류탄을 던졌으며 1932년 4월 24살의 청년 윤봉길 의사는 일본군의 전승 기념행사에 폭탄을 던지며 국가로 부터 위임받는 임무를 완수합니다.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이봉창/윤봉길 의사, 이들의 의거는 임시정부의 위상을 드높였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의 존재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중국의 국민당 장제스는 "중국 100만 군대가 하지 못한 일을 단 한사람의 한국인이 해냈다"며 임시정부를 호의적으로 대하기 시작하였으며, 임시정부는 이것을 계기로 추진력을 받기 시작합니다. 일제의 중국 본토 점령이 극심해짐에 따라 임시정부는 이를 피해 계속 이동을 하였지만 중국의 지원과 정부 요인들의 노력으로 세력은 더욱 커져만 갑니다.


그리고 1939년 '광복전선'과 민족전선으로 구분되어 있던 독립운동의 양 진영을 합하기 위한 김구선생과 김원봉은 좌우합작 성명서에 공동 서명을 하게 되었지만 총 7개의 당 중 두개의 당이 불참하면서 실패가 되고 말았습니다.







@ 1940년 한국광복군 창설


1940년 3월, 임시정부의 맏형인 이동녕이 사망하게 되면서 임시정부 산하의 정당들만이라도 통합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김구선생은 세개의 당을 '한국독립당'의 이름으로 통합하게 됩니다.

이렇게 임시정부의 대표가 된 김구선생은 장제스의 지원을 받게 되고 드디어 정식 한국인 군대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핵심인 미군은 일본군을 차례로 격파해 나가고 이 소문은 임시정부를 한껏 들뜨게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타서 임시정부는 탄력을 받아 국제사회의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해 줄것을 요청하였으며, 장제스도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승인을 요청하게 됩니다. 미국은 이 요청을 외면하였지만 임시정부 내부적으로는 더욱 똘똘 뭉쳐서 독립운동계 전체가 참여하는 임시정부를 구성하게 됩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김구선생




@ 1944년 드디어 통일정부의 출범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민족혁명당이 합류하게 되면서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이 취임하였으며, 드디어 명실상부한 통일정부를 만들어 대내외 위상을 드높이게 됩니다. 그러던 1945년 8월 김구선생은 미군 대표 도노번 소장과 만나 한미 특정 작전회의를 하였으며 일명 '서울 진공 작전'을 선언하게 됩니다.


'서울진공작전'은 한국광복군을 한반도와 일본에 투입하고 일본군에 후방공작을 펼치면서 우리 민족의 손으로 광복을 맞이할 수 있는 교두부를 마련하는 군사작적이었지만 이 작전은 이내 실행되지는 못하였습니다.



@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날!!!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9일에는 나가사키에 미군의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8월15일 드디어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되고 이런 이유로 '서운 진공 작전'은 무마되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지 26년 4개월 만에 드디어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았지만 결국 우리 한민족의 손으로 이루어낸 광복은 맞이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자주적이지 못했던 광복은 결국 강대국들의 이념이라는 잣대에 그려져 38선이 만들어졌습니다.


남과 북을 오가면서 통일한국을 간절히 주장했던 김구선생은 1949년 6월 26일 아직도 배후가 밝혀지지 않은 안두희의 총에 맞아 서거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꼭 1년이후 설마했던 동족상간의 비극은 현실이 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존재는 점차 잊혀져 갑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김구선생




역사를 잃은자는 미래도 없다는 말을 다시금 새기게 만드는 역사의 한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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